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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화HRD] 이슬람 배우기 - 요점정리 노트

Education/교육

by kh2020 2015. 10. 29.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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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해외사업 사례 전파교육 - '이슬람의 이해' 두 번째 스토리]

 

 요즘 월드뉴스 중 뜨거운 이슈는 단연 ‘IS라 불리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문제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폭력 행위는 더 가혹해지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문제가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문제인지. 이슬람을 표방하는 국가의 문제인지 그저 과격한 한 단체의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갑론을박을 하기 전에 우리는 얼마나 이슬람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제3, 4회 해외사업 사례 전파교육은 우리회사가 이슬람권의 해외사업 비중이 증가하는 가운데 이슬람 문화와 역사의 진실을 통해서 이질감 없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갖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두 차례에 걸친 이슬람의 이해교육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이슬람 세계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줄 요점정리 노트를 공개합니다.

 

열정적으로 교육중인 강계원 부사장

 

1. 이슬람 해를 가로막았던 지적인 걸림돌

 

 이슬람에 관한 정보와 지식체계는 서방 언론의 부정적이고 편파적인 보도를 통해 무지 속에 방치해 왔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나?

 

 

   ① 건국 이후 오늘날까지 한 번도 우리의 입장에서 제대로 이슬람과 이슬람 사회를 들여다볼 기회의 창을 가져보지 못했다.

   ② 이슬람 세계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적대적 이해당사자인 유대와 미국 중심의 언론과 정보를 통해서만 이슬람의 문제를 인식하고 판단하다보니 조직적으로 양산된 오류와 편견을 갖게 되었다.

   ③ 일부 급진 이슬람 과격분자들의 테러와 폭력행위를 전체 이슬람의 모습으로 이미지 메이킹해 가는 서구의 홍보 전략을 무분별하게 수용하고 있다.

   ④ 이슬람과 아랍을 동일시하는 초보적인 상식의 오류가 지적사회에까지 반영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이슬람의 본질적인 가르침과 유목적인 환경에서 생겨난 아랍의 토착적인 관습과 전통문화를 구분하지 못한다.

   ⑤ 이슬람은 서구 가치체계와는 달리 정교일치 사회구조를 갖고 있다. 종교가 삶에 완전히 녹아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정교분리의 시각으로 보면 답답하고, 전근대적이고 후진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2. 이슬람 무엇을 믿고, 무엇을 지키는가?

 

 

 이슬람(Islam)의 언어학적인 어원은 평화이고, 신학적인 의미는 복종이다.

 

 즉 이슬람 사상의 요체는 알라(유일신)에게 절대복종을 통해 평화를 얻는 것이다. 평화야말로 이슬람의 핵심이며, 삶의 구체적이고 궁극적인 목표이다. 이슬람의 신학적인 의미인 복종은 유일신 하나님에게 절대복종하는 것이며, 그 절대자 하나님을 아랍어로 알라라고 한다. 종전의 모든 계시를 요약하여 종교의 통일성에 결론을 내린 것이 이슬람이고, 이 계시를 간직한 것이 꾸란이며, 그 예언자는 무함마드이다.

 

 이슬람의 실천 강령과 신앙체계는 흔히 오주육신(五柱六信)으로 압축되는데, 무슬림의 5대 의무는 신앙의 증언, 하루 다섯 차례의 예배, 자선을 위한 구빈세, 라마단 한 달 동안의 단식, 능력 있는 사람에 한해 평생에 한번 메카를 순례하는 것이다. 믿음은 일반적으로 6가지이며 창조주 유일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 천사나 사탄 정령들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믿음, 성서들에 대한 믿음, 선지자 및 예언자들에 대한 믿음, 심판의 날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섭리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다.

 

3.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는 누구인가?

 

 무함마드는 570422, 메카의 지배부족이자 구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일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쿠라이시족의 하심가문에서 유복자로 출생했다. 청년이 된 뒤 시리아를 왕래하는 무역상이 되어, 부유하고 고결한 성품의 미망인 카디자의 대상에 고용되었다. 무함마드의 정직하고 성실한 성품에 감동한 카디자가 구혼하여, 무함마드는 59525세의 나이로 40세의 미망인 카디자와 결혼했다. 생활에 여유를 얻게 된 무함마드는 40세가 된 610, 세속적 생활에서 이탈하여 메카 교외의 히라산에 있는 동굴에서 명상생활에 들어갔다. 그 해 처음으로 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을 통하여 알라의 계시를 받아 '알라 외에는 신이 없다'는 유일신 신앙을 갖게 되고, 신으로부터의 메시지를 전하는 '신의 사도'가 되었다.

 

 615년에는 신도 일부가 아비시니아로 피신하자, 그곳 그리스도교도에게 환영받았으나 무함마드 자신은 전부터 타협을 해두었던 메디나로 이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622924일 아부바크르 등 70여 명과 함께 메카를 탈출하여 메디나로 갔다. 이를 히즈라라고 하는데, 훗날 이 해를 이슬람력()의 기원으로 삼게 되었다(622716).

 

 당시 메디나에는 내분이 있었으나 무함마드는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여 사태를 수습하고, 메카에 대항할 수 있는 군대를 양성하는 동시에 이슬람 공동체 '움마(Ummah)'의 모체를 만들어내었다. 무함마드의 메카 정복 이후 아라비아 반도 전역의 각 부족은 속속 이슬람교를 받아들여 이슬람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6323월에는 메카에서 예배를 지내고, 무함마드 자신이 순례를 지휘하였다. 그 후 그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어, 63268일 사망하였다.

 

4. 순니와 쉬아의 비교

 

 무슬림 세계에는 두개의 계파가 있다. 무슬림의 90%를 차지하는 순니파와 10%를 차지하는 쉬아파이다. 순니와 쉬아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무함마드가 죽은 후 그의 후계자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시작된다. 즉 순니파들은 무함마드와 혈연관계가 없다하더라도 이슬람의 통치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보지만, 쉬아파는 무함마드가 남긴 유일한 남자 혈육인 알리(4대 후계자)의 혈통만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순니와 쉬아 모두 오주육신(五柱六信) 의무사항은 공통적이다. 다만 순니와 쉬아의 가장 큰 차이는 종교지도자 '이맘'에 대한 정의의 차이다. 순니는 이맘이 종교적인 지위에 지나지 않으나 쉬아는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지도자의 지위까지 더해진 것이다. 따라서 쉬아파의 대표적인 국가 이란을 비롯해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파키스탄 등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은 사회 전반에 걸쳐 정치적인 힘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쉬아파의 원인이 저항에서 시작된 만큼 대체로 순니파보다 과격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당시 100년 동안 순니파로부터 탄압받으면서 형성된 기질인 셈이다. 최근 들어 쉬아파가 다시 조명을 받게 된 것은 소수의 극단적인 저항운동 때문이다.

 

5. 이슬람의 급속한 전파요인(한손엔 칼, 한손엔 꾸란)

 

 이슬람교는 발생하자마자 급속히 전파되기 시작했다. 이슬람은 발생한 지 100년도 안된 짧은 시간 동안 지금의 중동은 물론 북아프리카로부터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 중국을 비롯하여 스페인을 위시한 유럽까지 점령하였다.

 

 

 이슬람 문화가 빠르게 전파된 가장 큰 이유는 특유의 융화력이다. 아랍인들이 만든 진정한 기적은 군사적인 정복보다 오히려 정복된 지역을 이슬람화한 것에 있다. 불화 관계에 있었던 그리스, 로마 및 고대 서남아시아지역의 다양한 지중해 문화와 인도 및 중국 문화의 오랜 접촉을 가진 페르시아 문화를 융합시켰다. 서로 다른 수많은 인종, 신앙 및 문화가 이슬람 영역 내에 공존함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이슬람 문명이 생성되었고 아랍적인 이슬람의 독특한 색채를 띠게 되었다.

 

 이런 융화력과 관용성으로 형성된 이슬람 세계는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역사학, 지리학, 철학, 천문학, 대수학, 물리학, 화학, 의학, 연금술 등을 독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중세 유럽이 암흑의 상태에 있을 때에도 세계 문화의 정체를 막았으며 더욱이 이슬람 학문과 과학은 유럽에 전파되어 르네상스의 기초가 되었다.

 

6. 무슬림들은 왜 그렇게 미국을 싫어하는가?

 

 무슬림들은 미국을 지구상에서 가장 타락하고 퇴폐한 문화를 가진 국가로 간주하여 배척하는 경향이 심하다. 미국이 퇴폐적인 성문화나 극단적인 물질주의 문명에 대한 반감이 그 이유 중에 하나기이도 하지만 기본적인 뿌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얽힌 문제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유럽 대부분 나라에서 반유대주의를 국내 통치를 위한 정치적 무기로 사용하게 되자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정치적 반유대주의에 의한 박해는 유대인으로 하여금 시온주의라는 자구책을 강구하게 하였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 중 팔레스타인의 반 터키 운동을 촉발시켜 전쟁을 승리하기 위해 유대인과 아랍인에게 터키로부터 독립국가 건설을 지원하겠다는 이중 약속을 맺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후 1947년 미국 주도하에 유엔은 팔레스타인 분할 안을 의결하였으며 난민 지위로 떨어지게 된다. 그로인해 반미 감정은 극에 달했으며 4차에 걸친 중동전쟁을 통해 아랍은 처절한 패배를 당하게 된다.

 

 아랍세력은 15세기까지 유럽을 능가하는 세력으로 군림하다 그 후 유럽에 역전되기 시작하여 18,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최악의 상태인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고, 20세기에 들어와서 비록 독립은 하였지만 아직도 힘의 균형은 역전되지 않고 있다.

 

7. '아라비안 나이트'는 문학인가? 포르노인가?

 

 어린시절 신밧드의 모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알라딘과 요술램프등에서 접한 최초의 아랍 문학작품은 우리에게 이국 세계에 대한 경이로움과 감탄을 주었고 우리들은 신비의 상상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진기하고 공상적인 <아라비안 나이트> 곳곳에 외설적인 성의 이야기가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이 이야기들을 계속 문학작품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딜레마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아라비안 나이트가 탄생한 배경은 이러하다. 페르시아 왕 샤리야르는 어느 날 사냥에 나가고 없는 틈에 왕비가 흑인 노예와 희롱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격분하여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을 살해해 버렸는데, 그 일로부터 여자의 불성실을 증오하게 된 왕은 새로이 법령을 내려 온 나라 안에서 미인을 하룻밤에 하나씩 아내로 맞아들여 그 다음날 아침이면 사형에 처하기로 정했다. 전대 미문의 이 법률은 온 나라에 퍼져 딸을 가지고 있는 부모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그 잔학을 벗어나려고 국외로 도망치는 사람도 많아졌다.

 

 이리하여 처녀란 처녀는 살해되든가 도망치든가 하여 마침내 재상의 큰딸이 불려 들어가게 되었다. 노재상은 슬픔에 잠겼으나 딸 샤흐르자드는 자진하여 왕의 침실에 들어가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샤흐르자드는 영특한 처녀로 많은 진기한 이야기들과 역사와 전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왕과 동침을 한 후 동생인 둔야자드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진기한 이야기들을 전할 수 있도록 왕에게 간청하였고 왕은 이것을 허락하였다. 그렇게 하여 샤흐르자드는 왕과 둔야자드 앞에서 진기한 이야기들을 1,001밤 동안 계속하게 되었다.

 

8. 무슬림 여자들은 왜 '히잡'을 쓰는가?

 

 이슬람 세계의 무슬림 여성을 연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아마도 히잡이라는 가리개로 얼굴을 가진 모습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히잡 착용의 관습은 이슬람 이전 시대부터 존재해 왔고 구체적으로 명시된 것은 꾸란이라고 하지만 여성이 가려야 할 신체 부위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럼 무슬림 여성들은 왜 히잡을 착용하는가? 우선 꾸란에서의 여성관, 즉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보호관과 현대 이슬람 국가의 전통적 페미니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슬람은 종교적인 임무와 수행에서 남녀의 평등을 규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남성과 여성의 권리는 동등하나 각각의 역할과 일의 영역은 다르다고 말하기 때문에 이슬람은 여성을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보고 있다. 히잡 역시 보호라는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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